오늘날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富)와 사치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상류층을 뜻하지만 그 어원은 중세 소도시(bourg)에 거주하며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던 평민, 즉 사제와 귀족 다음의 제3신분이었다. 중세까지 이들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10세기경 유럽에 자유 도시들이 생겨나면서 ‘부르주아’라는 말이 이런저런 기록에 얼핏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도시와 농촌의 대결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했는데, 결국 도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부와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한 삶의 방식, 혁신적 사고와 행동 덕분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 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주민인 부르주아 계급은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 계급이 되었다.
돈과 교양과 여가를 갖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은 18세기에 이르러 모든 문학과 학문, 사상을 장악했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디드로 등이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이 반(反)역사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한 원시사회를 한없이 찬양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그 계급 고유의 정치적 투쟁 방식이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문제 삼을 수 없는 절대적 권리, 즉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갖고 있으며 자연은 이 세상 누구 하나도 빠짐없이 만인에게 똑같이 이 권리를 나눠주었다는 자연권 사상은 절대왕정의 특권이나 귀족의 기득권에 대한 무서운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 상승 부르주아지는 이 사상을 무기 삼아 자신들의 재산권은 전혀 다치지 않고 지배계급의 지배권만을 문제 삼는 데 성공했다.
역설적으로 이 계급의 승승장구를 도운 것은 왕이었다.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왕은 이 새로운 계급의 생생한 활력과 저항을 이용했다. 중세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일어난 민란이나 반란의 비밀이 그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모든 민란은 하층계급의 불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왕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왕은 이 모든 저항을 지원함으로써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그러니까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왕정과 민중봉기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관관계가 있었다. 마침내 귀족의 모든 정치권력이 왕정으로 이전됐다. 귀족을 완전히 무력화한 왕은 이제 절대 권력이 되었다.
그러나 왕은 새로 부상한 제3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이 권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이 새로운 계급에 맡겼다. 대혁명 당시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90%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미 국가를 다 떠맡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적대 세력, 즉 형식적인 수장(首長)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지푸라기 허수아비 인형의 목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루이 16세가 무능해서였다느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를 해서라느니 하는 해석들은 한갓 부질없는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 박정자(상명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17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