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유럽대륙에 미·소 간 긴장관계로 신(新)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은 핵탄두를 탑재한 신형 중거리 미사일(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했다. 당시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서기장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은 나토(NATO)의 ‘이중결의’로 맞대응했다. 주 내용은 1979년 12월 나토 회원국들이 소련과 협상에서 기왕에 배치된 중거리 핵미사일 철수를 유도하되, 실패할 경우 1983년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퍼싱-II 108기와 크루즈 미사일 464기 등)을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사전에 예고됐지만, 상대는 무시했다. 4년 뒤 서방이 이를 실행하자, 동독은 서독 내 신공산당(DKP)과 독일평화연맹(DFU) 같은 각종 위장단체를 동원해 핵전쟁 가능성을 퍼뜨리는 등 불안감을 조장했다. ‘서독이 필요한 것은 재무장이 아닌 평화’라며 시위도 주동했다. 안보 불안에 기인한 나머지 ‘평화’란 용어를 선점, 사용하면서 국민에게 오도된 인식을 각인시킨 것이다. 핵미사일 배치계획을 철회시키기 위해선 서독 내 국론을 분열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토의 ‘이중결의’와 서독의 재무장을 주장한 정치지도자는 당시 진보 성향의 사민당(SPD) 출신 슈미트 총리였다. 그는 대(對)소련 외교의 핵심은 “군사적으로 방어 능력을 갖추고, 군사적 균형에 의존해 소련과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 사민당의 기본 입장은 반핵(反核)이자 서독의 재무장 반대였다.
슈미트 총리의 정책 기조를 후임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 총리가 계승했다. 마침내 1983년 11월, 의회는 나토의 핵무기 배치계획을 승인했다. 콜 총리는 “나토의 재무장 계획이 무산됐더라면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해체, 독일 통일, 유럽연합(EU) 창설 등 유럽의 안보 도모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 문화일보 2016년 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