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로 가는 길
형법에 새로 생긴 ‘벌금 50억원’

이른바 ‘황제노역’ 판결이 온 세상을 뒤흔들자 국회가 형법 제70조 제2항을 신설하였다. 환형유치기간을 벌금 1억원 이상 5억원 미만은 300일 이상,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은 500일 이상, 50억원 이상은 1000일 이상으로 강제하였다. 국민의 건전한 상식선을 벗어난 재량 판단이 급기야 ‘기본법’인 형법의 개정으로 이어졌다.
대의제 하에서 국회가 국민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문제 상황을 바로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선 것 자체는 탓할 바 아니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정부입법보다 절차가 간편한 의원입법이 빛을 발한 경우다. 이번 개정 형법의 입법취지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법률은 그 입법취지와 내용만이 아니라 법체계와의 정합성도 따져봐야 한다. 의원입법은 심의가 불충분하면 졸속 입법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찾아봐도 형법에는 벌금액에 ‘억’ 단위는 도대체 존재하지를 않는다. ‘천만’ 단위만 있다. 형법상 인신매매죄에 대해 5천만원 이하 벌금을 병과할 수 있다. 업무상 횡령·배임죄가 3천만원 이하이고, 사기죄는 2천만원 이하이다. 개정 형법이 상정하는 5억원이나 50억원은 형법에는 없다. ‘억’ 단위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금융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등의 가중처벌법이나 특별형법에 가서야 비로소 나온다.
법체계상 형법 제70조 제2항을 신설한 것은 오류다. 형법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모든 가중처벌법이 폐지되는 경우를 상정해보면 형법 제70조 제2항은 정말 엉뚱한 조문이 된다. 혹자는, 형법총칙 조항은 어차피 형법각칙만이 아니라 특별형법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형법 제70조 제2항을 신설해도 잘못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가중처벌법을 왜 따로 두는지를 몰라서 하는 주장이다. 특가법을 형법에다 편입해도 된다는 논리와 진배없다.
‘황제노역제한법’은 형법 개정이 아니라 다른 법률 제·개정 방식이 옳았다. ‘벌금 미납자의 사회봉사 집행에 관한 특례법’이 그 예다. 형법으로 해결하려면 형법에 존재하지도 않는 벌금액수를 기준으로 할 게 아니라 그와 유사한 결과가 도출되는 ‘추상적인 계산식’을 신설하는 방식을 취했어야 한다.
대한민국 형법은 ‘기본법’으로서 외국에도 번역되어 나가고 외국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된다. 그들이 뭐라고 할지 난감하다. 과거에 여론이 비등해지면 정부와 국회는 가중처벌법을 통하여 해결하였다. 그래도 기본법인 형법에는 감히 손을 대지 않았다. 국민여론이나 형사정책적 필요는 특별법·특례법에다 숨겨두었다. 살인죄보다 높은 법정형의 가중처벌규정을 형법에다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대외용 ‘전략적 이중성’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너무 쉽게 형법을 건드리면 국격이 손상된다. 형법은 한 나라의 법률로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국회가 2010년에는 ‘징역 50년’으로, 이번에는 ‘벌금 50억원’으로 형법에 흠집을 냈다. (법률신문 201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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