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0년과 2001년 새해 첫날에 가족들과 현충사를 찾아갔다. 창원지법 진주지원에서 부장판사로 근무하던 2001년에는 이순신(李舜臣 : 1545-1598)의 선견지명과 애국심을 화두로 삼아 퇴근 후 쓸쓸한 관사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2001년 가을호 「예천문학」지에 기고한 수필 「<불멸>,그리고 〈칼의 노래>」를 여기 싣는다.
현충사에서
나는 아직 철이 들려면 멀었나 보다.
돈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대접을 달리 하는 시대에, 그 무슨 큰 벼슬이라고 선주단지 안고 있듯 놓치지 못하고 공직(公職)을 꿰차고 앉아 국록(國祿)만 축내고 있는 꼴이, 영락없이 이른바 ‘가난한 아빠’의 전형(典型)이 아니런가?
게다가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늘 이순신 타령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한 채 맞이한 21세기의 첫해가 바로 2001년이다.
새해 첫날에 나는 그 전 해처럼 아내와 녀석들 둘을 대동하고 아산 현충사(顯忠祠)를 찾아가 거기서 나에게 풋풋한 한 해가 되기를 무진 빌었다.
이들이 내게 눈빛으로 갈망해 마지않는 것은 저 휘황찬란한 해외여행이건만, 그것은 일단 나중―그것이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른다―으로 무작정 연기해놓고 말이다.
제승당에서
2001년 1월 6일. 통영에서 가족과 함께 관광선을 타고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으로 떠났다.
한산 섬 부두에 내려 제승당까지 가는 바닷가 진입로는 꾸불꾸불하되 너무나 정갈하여 다시 한번 걷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한산대첩 후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웅크린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수루(戍樓) 옆 나무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백척간두 조국을 애타게 근심하였다.
녀석 둘은 여기가 어딘 줄도 모르고 이순신이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그 수루에 먼저 올라가 북을 둥둥 두드린다.
그렇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싶으면 조금 더 높이 올라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慾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멀리 한려수도 바닷길이 쪽빛으로 갈라지며 비늘 같은 물결로 일렁인다.
“얘들아. 제승당 입구에 충무공 정신이 적혀 있더구나. 그걸 외워 보거라."
“첫째,멸사봉공의 정신,둘째,창의와 개척의 정신,셋째,유비무환의 정신."
금방 소리 높여 복창하는 모습이 마치 둥둥 북소리를 듣고 살아난 이순선 제독의 부하 군졸 둘을 보는 듯하다.
<불멸>
2001년 5월 4일. 평소 이순선과 선조(宣祖 : 1552-1608) 임금과의 정치적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면 퍽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신문에서 1998년에 김탁환의 『불멸』이라는 역사소설이 이순신을 그렇게 문제의 인간으로 다루었다는 기사를 보고 궁금하던 차에 『불멸』전4권을 샀다.
내가 단신 부임하여 근무하는 진주로 내려와 홀로 관사에 틀어박혀 『불멸』을 정독하니 연초에 가 본 제승당의 정경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한산도 깊숙한 포구에는 전선 수백 척이 푯대를 휘날리며 정박해 있는 듯하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한산도 외로운 골방에 앉아 책장을 넘기거나 일기를 쓰거나 장계를 초하던 이순신의 모습이 너무나 가엾다.
이순신의 부단한 자기계발 노력과 치열한 기록정신, 그것은 그가 사마천(司馬遷 : BC 145?-86?)을 동경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순신은 자기는 다시 태어나면 문관(文官),그것도 사관(史官)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궁형(宮刑)을 당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유장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 내려간 사마천과 같은 사가(史家)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불멸의 역사 그 자체이다.
<칼의 노래>
2001년 5월 20일.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전2권을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바로 이순신이다. 약하면서도 강한 실존적 인간 이순신의 처절한 독백이자 고백이다. 백의종군에서 전사까지를 너무나 감각적으로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수군을 총동원하여 적의 퇴각로를 가로막고 백성의 원수를 반드시 갚고자 벌어진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에 임하는 이순신의 각오와 결의가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순신은 자신이 선택한 죽음에 앞서 독백한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 멀리서 임금의 해소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이광수(李光洙 : 1892-1950)는 이순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인 큰 사람”이라고 했다.
남해 노량리에서
2001년 7월 2일. 오후 3시에 남해군으로 현장검증을 떠났다. 현장검증 후 재판부 요원 다섯이서 이순신 전몰유허비와 이락사(李落洞)를 둘러보고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충렬사에 참배한 다음, 노량리 바닷가 방파제에 둘러앉아 밤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이순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스듬히 저물어오는 노량 앞 바다에는 이순신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듯 핏빛이 역력하다.
하늘에는 성근별이 스쳐 지나간다. 별은 향상 존재하면서도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늘 별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순신은 저 불멸의 별이다.
다시 제승당에서
2001년 8월 19일. 내 고향은 ‘소나무에 달이 걸린 듯한’ 마을이다[松月里]. 게다가 그 달이 달기까지 하다[月甘].
그 고향 마을을 평생 지키고 계신 부모님께서 버스를 타고 진주까지 아들을 찾아오셨다.
통영으로 출발하여 충무마리나리조트에서 점심을 대접한 다음 유람선 선착장에서 한산도 행 페리를 타고 15분 후에 한산도 제승당에 도착하였다.
아버님께서 사당에서 향 값 5천 원을 봉투에 넣고 묵념을 하신다. 나는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하면서 그저 따라 한다. 그 사이 어머님은 수루에 혼자 앉아 기다리신다. 한산도에서 내가 이순신을 죽 이야기해 드리자 어머님께서는 ‘네가 참 많이도 안다.’고 칭찬 하시지만,아버님께서는 ‘해군장교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신다.
이순신은 장군이 아니라 제독이다.
현충사와 제승당을 찾아간 나는 과연 이순신에게 무슨 역사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일까?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의 큰 칼 중에 검명(劍名)이 「一揮掃蕩血梁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고,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인 칼이 있다. 그 칼은 이곳 제승당에서 만든 칼이다.
이렇게 지낸 2001년, 나의 화두는 이순신의 그 선견지명과 애국심이었다.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는 모두 나그네이기도 하듯,관직 또한 나그네가 잠시 머무는 곳이다. 거기서 하루를 묵더라도 주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진실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하늘 아래 항상 올바른 위치에 서 있어야 하고 큰길을 가야 한다”[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내 스스로 누리는 삶과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조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나간 인생 역정에서 되돌아볼 때 나는 과연 국민의 복지와 국가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겼는가,아니면 나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중요하게 여겼는가.“
이런 생각들이 혼란스럽게 머리 속을 오고 가는데,한산도를 빨리 떠나 육지로 가자고 재촉하는 관광선 뱃고동 소리만 요란하다. <2001년 가을호 「예천문학」>
2003년 가을. KBS 한국방송은 2004년에 <불멸>과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하여 대하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영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의 강인함과 철저함만이 아니라,너무나 나약한 보통 인간의 변모도 아울러 제대로 묘사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나라 경제는 어렵고 서민들은 살아가기 고달프다는 요즈음, 무슨 묘안이 없을까?
경제전쟁시대에 기업 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서강대 지용희 경영학 교수가 쓴 책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디자인하우스,9천원,총 160여쪽)는 쓸모 있는 여러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경영학자인 저자는 이순신에게서 걸출한 21 세기형 CEO의 자질을 발견한다.
저자는 이순신과 관련된 전국의 사적지를 직접 답사하고 느낀 소회를 시원스런 현장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는 다시 400여년 전으로 돌아가 한산대첩,백의종군의 대장정,명량대첩,거북선,난중일기,노량해전 등의 역사를 소개한 다음,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경영학적 지혜를 뽑아냈다.
즉 기본으로 돌아가라,신뢰재(信賴財)의 가치,정신과 리더쉽이 기적을 만든다,4차원의 경쟁력을 갖춰라,기록이 경쟁력이다,필요는 경쟁력의 어머니,자만하면 안 된다 등등......
신뢰재의 가치를 말하는 대목에서,저자는,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말을 인용한다.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
그리고 나서,저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주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사업에 실패하는 경우 친지,종업원,거래 상대방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채권자들까지 나서서 도움을 주어 재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조그만 이익을 탐하다 신용을 잃으면 어려울 때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잘 나가다가도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58쪽).
신뢰재의 가치,그것이 어디 사업에서만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