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로 가는 길
주취감경

남재희 선생의 책 <통 큰 사람들>에 나오는 얘기다. 1970년대 유신 후반 무렵 민기식 국회의원이 술을 많이 마시면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어. 개헌하자는 김영삼 얘기가 맞아.”라고 발언하였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만 말해도 처벌 대상이었다. 예비역장성이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민기식은 골프를 치다가 중앙정보부에 전격 연행되었다. 중정은 고민이 깊었다. 육군참모총장과 국회국방위원장을 지낸 현역 국회의원에다가 박 대통령이 총애하는 만주 건국대 출신 예비역장성이 긴급조치를 위반했다고 공개적으로 처벌할 수도 없고, 그냥 놔두기도 뭣하여 꾀를 냈다. “장군님. 그때 술에 만취하여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시지요?” 주취감경으로 용서해 주겠다는 묘책이다. 그런데 민기식 왈, “아니. 나 그렇게 안 취했는데.”라고 하니 난감한 일이다. 두뇌회전이 빠른 민기식은 봐주려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채고 답한다. “맞아. 그랬던가?” 그리고는 박 대통령에게 사과편지를 쓰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소생, 술에 만취하여... 앞으로는 절대 술을 안 마시겠습니다.” 그 후에도 박 대통령과 민기식은 통음을 하고는 하였다는 일화다. 형사합의부 법정에서도 피고인을 술에 취하게 한다. 강도상해로 기소되었으니 법정형이 징역 7년 이상이라 작량감경을 해도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다. 만취해 절도를 하려다 발각되어 도망하던 중 체포를 면탈하려고 피해자를 한 대 때려 1주 진단이 난 사건이라면, 집행유예를 하고 싶어진다. 아니면 한 번 더 감경하여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말아야 할 사건이 있다. 현명한 국선변호인이 피고인에게 술을 먹인다. “피고인, 다시 묻겠는데, 그때 술에 만취하여 무슨 짓을 하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요?” 심신미약을 예비적 목표로 삼아 일단 심신상실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정직한 피고인 왈, “아닙니다. 저 술을 좀 마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착한 피고인은 술 먹고 그런 짓을 하였다고 하면 더 엄히 처벌받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변호인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뇌회전이 빠른 피고인이 뒤늦게 눈치를 채고, “맞습니다.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라고 답변하면, 사건은 일단락된다. 반면에, 순박한 피고인이 여전히 눈치도 없이 도무지 굽히지 않고 초지일관하여, “저, 술에 만취한 것은 절대 아닌데요.”라고 버티면, 인자하신 재판장님은 웃으며 상황을 정리한다. “피고인은 사건 당시 자신이 어느 정도로 취했는지 모를 정도로 술에 만취하였군요.” 후자는 경험담이 아니라 들은 얘기다. 성폭력범에 대한 주취감경이 문제 되자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0조는 음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 성폭력범죄를 범한 때에는 주취감경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법관의 재량에 대한 제한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국민의 상식과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재량권을 잘못 행사한 법조선배들이 자초한 위난이 아닌지, 나도 반성하고 있다. 세상사 속의 삶을 다루는 법조인은 늘 ‘법조인법’과 ‘국민정서법’ 사이에서 묘수를 찾아야 하는 운명의 직업이다. (법률신문 2014. 4. 2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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