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서울서부법원이 공덕동 청사로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6년이다. 영장당직으로 판사실에 늦게까지 혼자 남아 있을 때면 영 기분이 이상하였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그 터 때문이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독립운동가들이 거기서 죽어나갔다. 해방 후 마포형무소·교도소가 되었다가 1963년 안양교도소가 생기면서 폐쇄된 후 경서중학교가 들어왔다.
1970년 현충사 수학여행 길에 버스가 기차와 충돌하여 경서중 학생 4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 여파로 나는 중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 10년 후 1980년에는 경서중 1학년생 이윤상 군이 같은 학교 체육교사에게 유괴 살해되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터가 문제여서인지 학생이 줄어든 경서중은 1992년 딴 데로 이사를 갔다. 그 자리에 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왔다. 서울서부법원은 청사를 짓던 건설사가 부도가 나는 우여곡절까지 겪었다.
서울서부법원은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법정의 복도에 서예와 미술 작품을 대거 걸었다. 지금도 나는 재판 받으러 갈 때마다 예술품이 가득한 갤러리 같은 법정 복도를 둘러보면서 잠시 여유를 찾는다. 그때 그런 결정을 하고 추진한 선배들의 선견지명에 감탄한다. 아마 그 터를 못 떠나고 맴돌던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준 것은, 법원·검찰 특유의 강한 기(氣)가 아니라 예술의 부드러운 힘이었으리라.
서울서부법원의 경우, 비유하자면 마루에는 올라섰으나 아직 방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창원지법은 최근 그림과 사진 작품을 법정 안에 거는 ‘예술로 소통하는 힐링 법정’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예술이 이제 법정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다. 1997년 미국의 법정을 둘러보았을 때, 법대 뒤의 벽화와, 법대 위의 컴퓨터, 화분, 주전자, 물잔이 인상적이었다.
법정은 대개 근심과 걱정의 공간이다. 삭막하다. 눈물 맺힌 눈으로 눈물을 닦아달라고 법대를 응시하는 곳이다. 나도 법대를 올려다보면 숨이 턱 막힌다. 법대가 밑에서 보면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다. 법대 앞에 서면 아직도 긴장된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주눅이 든다.
병에 물을 담으면 물병이 되고 꽃을 담으면 꽃병이 된다. 법정에 예술품을 담으면 예술법정이 된다. 법정 안에 은근한 예술품이 걸려 있고 법대 위에 향기로운 꽃병이 놓여 있는 풍경을 그려본다. 법정의 예술 작품은 예술처럼 아름다운 재판으로 가는 장치다. 법정이 소통과 대화와 경청의 공간이 되기 위한 소품이다. 예술법정 프로젝트가 전국으로 퍼져갔으면 좋겠다.
이제 법조도 상상력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날마다 새롭게 또 새롭게 가다듬어야 발전한다. 그렇다고 불의(不義)한 판사의 살가죽을 벗겨 아들이 앉는 의자에 깔도록 하였다는 ‘캄뷔세스 왕의 재판’ 같은 끔찍한 ‘경계화’를 법정에 걸어두어 판사로 하여금 늘 경계하도록 하자는 식의 상상력까지는 발휘하지 말기를 바란다.
(법률신문 2014. 8. 25.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