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은 대법원의 대법정에서 중요 사건에 대해 소송당사자의 변론을 듣고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는 제도이다.
대법원은 2003년 12월 여성도 종중원으로 인정해 달라는 ‘딸들의 반란’ 민사사건에 대해 사법사상 첫 공개변론을 열었다.
대법원이 형사상고심 재판에서 최초로 공개변론을 연 것은 한참 후인 2004년 9월 16일이다. 사건은 바로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에 관한 형사사건(2002도537)이었다.
이 사건은 폭력조직 두목인 주모씨와 행동대원인 이모씨가 짜고 주모씨의 기존 질병인 허리 디스크를 교통사고 후유장애인 것처럼 속여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편취한 사기 사건으로, 원심에서 주모씨는 징역 8월과 벌금 3백만원, 이모씨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변호인은 나중에 대법원장을 지낸 이용훈 변호사와 나중에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종훈 변호사였다.
이용훈 변호사의 상고이유 제1점은,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의 경우 형식적 진정성립(서명날인이나 서명무인)이 인정되면 실질적 진정성립(피의자가 검찰에서 조서 기재와 같은 진술을 했다는 점)도 사실상 추정된다는 권위주의정권 시대 이래의 20여 년 간의 기존 대법원판례를 변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변호인은 ‘원심이 유죄의 증거로 인정한 병원 의사 최모씨와 보험회사 직원 오모씨에 대한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 또는 진술조서 등에 대해 최모씨와 오모씨가 법정에서 조서 기재 내용이 자신들의 진술과 다르다고 주장해 실질적 진정성립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증거능력이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대법관실 전속 부장 재판연구관으로서 2003년 초반경 위 사건에 대한 조사·연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대법원은 공개변론 제도를 처음 시행하려고 하였고, 김능환 수석재판연구관(대법관 역임, 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재판연구관들에게 대법원의 공개변론에 적합한 사건을 추려서 보고하라고 하였다.
나는 위 사건이야말로 형사증거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을 다루고 있고, 종전 대법원판례의 변경 여부에 대한 법리적·정책적 논쟁이 가능하다고 보아, 공개변론에 적합한 사건으로 보고하였다.
그렇게 추려진 사건 중에서 공개변론을 하려고 하였으나 공개변론에서 참고인진술을 들을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다는 절차법상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대법원은 규칙제정권에 근거하여 2003년 10월 24일 대법원규칙으로 「대법원에서의 변론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였다. 그 후 2007년 6월 1일 개정 형사소송법 제390조 제2항에 참고인진술을 들을 수 있는 근거규정이 신설되어 법률로 승격되기까지는 대법원규칙에 의하여 대법원 공개변론절차가 규율되었다.
대법원은 ‘여성 종중원’ 민사사건에 대해서는 2003년 12월에, ‘검사 작상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2004년 9월에 공개변론을 열었다.
2004년 2월 재판연구관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된 나는 형사사건 최초의 대법원 공개변론을 앞두고 2004년 9월 16일자 <법률신문>에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한 기존 대법원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글을 기고하였다.
“법정에서 검찰조서의 기재가 자신의 진술내용과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고 다투는 경우를 왕왕 볼 수 있다. 현행법상, 피의자의 진술을 기재한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는 전문증거이므로 공판기일에서 진술자의 경험을 직접 듣는 것이 원칙이지만(형사소송법 제310조의2), 공판기일에서의 피고인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이 인정되면 증거능력이 인정된다(형사소송봅 제312조 제1항). 여기서 성립의 진정은 형식적 진정성립과 실질적 진정성립 양자를 의미하고, 전자는 서명·날인·간인의 진정을, 후자는 그 진술의 임의성이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진술과 조서기재의 일치」를 말한다(통설·판례).
그런데 대법원은 1984. 6. 26. 선고 84도748 판결 이래 「형식적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실질적 진정성립이 추정된다」는 입장을 확고히 해왔다. 이에 대해서는 법해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 상황 하에 대법원은 9월 16일 공개변론을 통하여 판례 변경 여부를 심리하기로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판례의 추정론은 이제 변경되어야 한다.
첫째, 추정론은 법해석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312조는 「원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함이 인정된 때」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문언상 「원진술자의 진술」 이외의 방법으로 진정성립을 인정할 수는 없다. 판례의 추정은, 법률상 추정이 아닌 바에야, 간접사실에 의하여 주요사실을 추단하는 사실상 추정으로 보이는데, 형식적 진정성립에 의하여 실질적 진정성립이 추정된다고 한다면 「원진술자의 진술」 이외의 증거방법에 의하여 진정성립을 인정하는 셈이 되어 명문규정에 반한다. 현행법상 가능한 문언의 의미 한계 내에서 형식적 진정성립에 의하여 실질적 진정성립이 추정된다고 해석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둘째, 추정론은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실질적 진정성립에 대한 입증책임을 사실상 피고인 측에 전가시키는 결과가 되어 타당하지 않다. 판례는, 피의자에게 조서 열람 기회를 주었다는 것과 이에 대한 이의진술권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추정론을 펴왔지만, 이는 진정성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절차규정에 불과하고, 조서 말미의 부동문자일 뿐이다.
셋째, 추정론은 결과적으로 공판중심주의를 형해화(形骸化)하여 형사재판권을 무력화시켰다. 검찰조서에 대하여 법정진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증거능력을 인정한다면 이로써 법관에 의한 재판은 사실상으로는 소추자인 검사에 의한 재판이 되어 공판중심주의의 왜곡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셈이 된다. 법정진술에도 불구하고 검사의 자백조서에 크게 의존하여 유죄를 선고하는 실무는 피의자로부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백을 받아내려는 유혹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변호인 참여 없는 조사실에서 심지어 철야수사를 통하여 획득된 검찰자백이 추정론에 의하여 공판정에서 증거능력을 쉽게 부여받아 증거의 왕으로 군림하도록 허용하는 틈새에서 2002년 고문치사사건이 생긴 것이다.
넷째, 이러한 판례의 추정론이 1984년에 나왔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당시 법원은 권위주의정권 하의 각종 시국사건과 공안사건에서 추정론을 통하여 검찰 자백 조서를 전가의 보도처럼 유죄증거로 썼다. 종래의 추정론은 한정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는 차원에서는 그 시대정신에는 걸맞은 기능을 어느 정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법관 대부분이 민사재판에 투입되고 일부만 형사재판에 투입되는 상황 하에서는 추정론을 통하여 「검찰수사를 추인하는 의식(儀式)」으로 재판을 운영하는 것이 현명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법관이 2천여 명에 이르고, 민사재판은 그 동안 집중적인 투자와 판례 정립, 집중심리나 신 모델 시행, 조정의 활성화 등을 통하여 상당한 국민적 신뢰기반을 마련하였다. 2003년 3월부터는 형사재판에 많은 법관을 투입하여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구현하려고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으며, 더욱이 배심제․참심제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이제 추정론이 폐기되더라도 재판 운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추정론을 통하여 「증거능력」을 쉽게 인정한 다음 개개 법관의「증명력」 판단에 모든 것을 일임한 채 대법원이 팔짱을 끼고 있기에는 검찰조서를 우회하여 무죄선고를 받기가 너무나 힘든 것이 형사사법의 현실이다. 이번 기회에 최고법원이 사법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현명한 판단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법원은 공개변론 후 2004년 12월 16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기존 판결 수십 개를 모두 폐기하였다. 조폭두목의 사건에서 형사증거법상 기념비적인 대법원판결이 나온 것을 보면서 미국의 유명한 「미란다 판결」이 떠오른다. 196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선언한 「미란다 룰」은 납치강간범 미란다 피고인의 사건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