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상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변호사는 때로는 상식에 맞지 않는 변론을 해야 할 경우가 종종 생긴다. 사건의 성격에 따라서는 국민정서나 국민상식에 도저히 맞지 않는 변론도 물론 해야 한다.
변호사로서 ‘법 조항의 작은 허점을 창의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죄형법정주의와 조세법률주의에 관한 주장을 강하게 할 때 주로 나타난다. 대개 그런 변론을 하는 경우 일반국민과 기자는 물론이고 정의감에 불타는 재판부로부터도 상식에 맞지 않는 변론을 한다고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작년의 일이다. 변호인으로서 열심히 변론한 형사사건의 1심 판결이 선고된 후에는 언론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게 마련이다. 한번은 고약한 기사를 발견하고 흥분한 일이 있다. 결심공판 때 방청한 기자가 기명으로 취재기를 크게 실은 것이다.
변호인으로서 몇 달에 걸쳐 힘들게 증인신문을 했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해서 찾아낸 공소사실의 법리상 및 사실상 문제점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결심공판에서 프리젠테이션 방식으로 최후변론을 한 사건이었다. 일반국민의 상식을 대변한다는 기자가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았을 때, 변론 내용이 상당히 못마땅하였던 모양이다.
그 취재기에 따르면, 졸지에 ‘상식 이하의 변론’이나 하는 엉터리 변호사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어떤 상식 밖의 변론을 했기에 그렇게 기자의 눈에 상식 이하의 변론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궁금하겠지만, 그 사건이 아직 상급심 계속 중이어서 구체적인 변론 내용은 여기서 밝힐 수 없다. 다만,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관한 변론이라고만 말하겠다.
물론 전문가가 아니어서 죄형법정주의를 제대로 알 턱이 없는 초보 기자에게 내 변론이 먹혀들 리는 없었을 것이다.
특종경쟁을 하는 신문의 기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 제목부터가 자극적이다. 시쳇말로 섹시한 제목이다
“법 틈새 교묘히 악용”
기사 내용은 더욱 신랄하다.
“결심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피고인 측은 상식을 깨는 변론으로 일관했다.... 법 조항의 작은 허점을 ‘창의’적으로 파고들었다.... 상식 이하의 변론에 이은 어처구니없는 판결.... 피고인 측 변호인은 법의 작은 구멍을 파고들었다.”
좀 심하다 싶어 그 신문사의 아는 기자에게 항의조로 하소연하자 1년차 기자가 쓴 것에 대해 너무 괘념하지 말라고 위로해준다.
그래도 화가 덜 풀려 집에 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기사를 보여주니, “당신이 상식 이하의 변론을 할 그런 변호사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이 신문이 ‘상식 이하의 신문’이거나 이 기사가 ‘상식 이하의 기사’이니, 그냥 무시하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나의 일방적인 변론만 들은 아내의 명판결을 선고받고 나는 기분을 풀었다.
변호사인 이상, 앞으로도 더 많은 사건에서 상식 이하의 변론, 상식 밖의 변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변호사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았다.
비슷한 경우인데, 근자에 법조 출신 정치인들이 변호사 시절에 ‘국민적 지탄을 받는 사람’을 변호한 것 때문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결국 국민상식에 비추어서 하는 비판이다. 이것이 과연 변호사 직에 대해 할 수 있는 정당한 비난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온다면, 나는 어떻게 나를 변호할 수 있을까?
“저는 단지 변호사이기 때문에 변론을 맡았습니다. 설령 사회적 지탄을 받는 악인일지라도 그를 위해 변론하는 것이야말로 헌법이 부여한 변호사의 역할입니다. 제가 변호사로서 누구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선택했음에도 다른 잣대로 문제를 삼는다면 변호사인 저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호사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類)의 자기변호도 국민들 입장에서는 상식 이하의 변론이요 상식 밖의 변론일지 모른다.
우리 변호사의 운명이란 이런 것이다. <대한변협신문 2012년 9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