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 김응현의 처음처럼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만해로 백담사 입구에 여초서예관이 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의 작품 6천여 점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서예 전문 기념관이다. 서울 출신 여초는 1996년부터 인제군에서 노후를 보냈다. 여초서예관 건물은 2012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을 정도로 조형미가 뛰어나다. 여초서예관은 재단법인 인제군문화재단(이사장 최상기 인제군수)이 인근에 있는 한국시집박물관과 함께 운영한다.
지난 5월 28일 인제군문화재단과 국회도서관은 지식정보 자원의 상호 공유 및 공동 활용을 위한 학술정보 상호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국회도서관은 2002년에 한국학술정보협의회를 창립하고, 국회전자도서관이 구축한 국가지식정보를 국민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공유와 협력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전 국민 지식연결망 구축이 목표다. 공공·대학·전문·학교도서관 등 관종의 구분도 없다. 광역지방자치단체 대표도서관부터 동네 작은도서관에 이르기까지 규모의 차이를 막론하고 국내외 정보수요기관과 업무협정을 체결했다. 2002년 연대대학교도서관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7,650개 회원기관이 참여하는 국가지식정보 협력의 중추적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이제 한국학술정보협의회를 법정단체로 자리매김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여초서예관과의 협약은 7,649번째다. 대개의 협약은 서면으로 간략하게 체결하지만, 나는 부서장들과 함께 여초서예관에 가서 협약식을 개최했다. 여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국회도서관은 1952년 2월 20일 임시수도 부산의 국회의사당 무덕전에서 직원 1명과 3,600여 권의 장서로 처음 개관식을 개최했다. 국회사무처 소속이었다. 그 최초의 직원 1명이 바로 25살 여초 김응현이다. 여초는 1호 직원이기도 하지만 그 꿈이 남달랐고, 국회도서관의 초석을 다진 분이다. 나는 여초서예관과의 협정의 체결을, 여초의 꿈과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의미 있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여초는 1927년 서울 번동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의 주전파 김상헌의 후손으로 명필 가문 출신이다. 국회도서관의 국회기록보존소 현판을 쓴 서예가 일중 김충현은 여초 선생의 중형이다. 여초는 휘문중학교와 동국대 전문부 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6·25전쟁 중 1950년 9월 28일의 서울 수복 후 대학생 신분으로 국회사무처 『국회보』편집담당 직원이 되었다. 일진일퇴의 전쟁을 수행하던 정부와 국회가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부산으로 천도하자 여초도 부산으로 따라갔다. 그때 여초와 유진오 선생은 당시 국립극장 첨탑에 있었던 국회사무처 법제조사국 도서실에 남아 있던 도서자료 104권을 챙겨갔다. 서울 재수복 후 사무처 다른 직원들이 추가로 290권을 운송하여 당시 국회임시의사당 부산극장에 총 394권을 보관하였다. 여초는 도서목록을 만들고 정리했다. 전시에 『국회보』발간 예산이 없자 여초는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는 없었고 그는 국회도서관 설립을 추진하자는 놀라운 생각을 했다. 여초는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국립국회도서관’을 설립한 미국·일본의 현명한 도서관정책을 부러워하며 이를 목표로 삼았다. 역사는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로마서 12:3)을 하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이다.
여초는 국회 문교위원장 윤택중 의원을 설득했다. 윤택중 의원이 1951년 7월 26일 대표발의한 ‘국회도서실 설치에 관한 결의안’이 1951년 9월 9일 국회 운영위원회를 거쳐 그 다음날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결의안을 보면 국회도서관의 성격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의 국가가 국회도서관은 특이성을 갖는 동시에 그 나라의 어느 도서관보다도 가장 내용이 충실하며 모든 도서 즉 출판물에 의하여 국내의 정확한 연구자료를 입수하는 것이야말로 국회의원의 입법활동에 매우 중요하므로 현재와 같은 곤란한 처지에 남과 같은 대규모의 도서관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우선 단 한 칸의 도서실이라도 설치하여 국내외의 신문이라도 입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회의원의 사명의 만분지일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함이 본 결의안의 취지입니다.”
이 결의에 따라 도서구입비 추경예산 5천만 원(圓)이 편성되었다. 국회 운영위원회는 윤택중·조시원·황성수 의원, 박종만 사무총장, 정운근 사무차장, 조중서 총무국장, 서상준 의사국장, 이선교·홍봉진·황숙현·이상규·서극형 전문위원 등 12인으로 국회도서관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시원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담당직원으로 『국회보』편집담당이던 여초를 배치했다. 준비위는 예산 중 30%는 국내서 구입비로, 70%는 외국서 구입비로 쓰기로 결정했다. 여초는 1951년 11월 입법조치를 통해 일약 ‘국립국회도서관’을 확립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국립국회도서관법안’을 초안해 국회 민의원 문교위원장 윤택중 의원에게 주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51년 12월 26일 존 무쵸 주한미국대사가 미국공보원 명의로 700권을 대여했다. 기증이 아니라 대여인지라 지금이라도 이것을 반환해야 하는지 검토해보려고 한다. 당시 내무위원회·교통체신위원회 회의실로 쓰던 방을 도서실로 정했다. 서가 7개에 1,094권을 정리하고 책상 1개를 설치하였다. 그 책상에서 여초가 근무했다. 마치 개인 서재와 같았다. 조시원·윤길중 의원, 이선교·이회근 전문위원, 여초 등 도서 구입단은 예산 중 30%인 1,500만 원을 가지고 상경하여 국내서 1,018권을 사왔다. 이 소문을 들은 서울대 이하윤 교수가 반평생 모은, 생명보다 귀한 개인 소장서 중 사변 통에도 남아 있던 쓸만한 문학책을 추려서 1,500권을 기증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트럭에 싣고 와서 서가 3개를 추가했다.
이렇게 총 3,612권을 가지고 1952년 2월 20일에 도서실에서 신익희 국회의장 참석 하에 정식으로 ‘국회도서관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이하윤 교수에게 감사장도 수여했다. 현재 국회도서관의 개관 기념일이 2월 20일인 이유다. 당시 유일한 직원이었던 여초는 국회도서관의 미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선 국회의 결의로 설치되는 것은 일개 국회도서실이지만 이것이 멀지 아니한 장래에 대(大)국회도서관으로 진전(進展)되며 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도서관 계(界)에 가장 큰 규모와 실제로 군림(君臨)될 것까지도 현명한 대한민국 국회의 의원 및 국회사무처 직원의 일부는 예상하였으며 또 이 이념으로 심력을 경주한 것은 사실이다.”(1953년 4월 통권 제3호『국회보』‘국회도서관의 설립과 장래’ 142면)
개관식 후 국회도서관 근거법이나 직제도 마련하지 않고 4개월 만에 국회도서관준비위원회는 운영위 결의로 해체되었다. 국회도서관 운영은 운영위에서 직접 맡기로 했다. 몇 달 후 직원 1명과 사환 1명이 추가되었고, 열람실장 격의 촉탁 1명이 추가되었다. 도서구입비 예산 5천만 원 중 70% 외국서 구입비 3,500만 원을 미화 13,600달러로 환산하여 한국은행 동경지점에 송금한 다음 외국서를 구입하기 위하여 1952년 9월 14일 정운근 사무차장이 직접 일본에 가서 정치, 법률, 경제, 산업 등 국회에 필요한 일서 13,000권을 구입하고 두 달 만인 11월 14일에 귀국했다.
1953년 9월 서울로 환도한 후 직원 4명의 국회도서관은 중앙청 4층의 비 새는 곳으로 갔다가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물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7, 8층 시계탑으로 옮겼다. 도서관 전문가도 채용하지 못했다. 여초의 표현에 따르면 ‘적재(適材)도 없고 적소(適所)도 없었다.’ 당시 직제상 관장직도 없었다. 김경수 제1대 국회도서관장이 취임한 것은 1955년 11월 15일의 직제 개정으로 사무처에 도서관장 직이 생긴 후인 그달 30일에 가서였다.
1955년 여초가 국회도서관을 떠나 『국회보』편집담당으로 복귀할 무렵, 직원은 촉탁 도서실장과 사환을 포함하여 총 5명이었지만, 모두 도서 비전문가였다. 장서는 3만여 권으로 늘었다. 여초는 국회도서관의 개관과 초기 운영 과정을 1953년 4월 통권 제3호『국회보』의 ‘국회도서관의 설립과 장래’ 및 1955년 5월 통권 제5호 『국회보』의 ‘국회도서관의 과거와 현재와 장래 : 국회도서관 설치 4년의 사실(史實)과 경험, 현실, 본질에서의 설계’라는 논문으로 상세히 기록했다. 역사의 기록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여초는 1953년 논문에서는 ‘국립국회도서관법 제정안’의 개요를 정리하여 두었고, 1955년 논문에서 ‘국립국회도서관법 제정안’ 전체를 실어 두었다. 미국의 의회도서관(LC)과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을 모델로 한 한국형 ‘국립국회도서관’의 원대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 양국의 기구를 참고하여 한국 실정에 비추어 정교하게 입안했다. 여초는 제3대 국회 김법린 문교위원장을 비롯한 법사위원을 통해 통과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여초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60년에 국회사무처에서 퇴직하였고, 그 이후에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국회도서관에는 여초의 서예작품 6점이 보존되어 있다. 1958년 국회사무처 근무 중에 국회도서관을 위해 특별히 쓴 숭문융무좌도우서(崇文隆武左圖右書, 문을 숭상하고 무를 드높이려면 왼쪽에는 그림이 오른쪽에는 책이 있어야 한다)는 수장고에 보존되어 있다가 내가 찾아서 관장실에 걸어놓고 매일 보면서 지침으로 삼고 있다. 1988년 『국회도서관보』200호 기념으로 쓴 범위천지(範圍天地, 천지의 조화를 범위로 삼다)와 민의권형(民意權衡 : 국민의 뜻을 고루 살펴라)도 명문이다. 국회도서관은 여초의 뜻을 담아 2002년에는 ‘국회도서관 개관 50주년 기념 여초 김응현 초청서예전’을, 2022년에는 ‘온라인 미술 전시 김응현 서예전’을 개최하였다. 2022년 3월 31일에 개관한 국회부산도서관 앞마당의 표지석도 여초서예관의 협조를 받아 여초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보면 볼수록 정갈하고 멋지다. 국회도서관 소강당 이름도 ‘여초홀’로 명명했다. 국회 경내에 각종 상징석을 세운다면 여초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면 좋겠다,
다시 보니 여초(如初)는 바로 ‘처음처럼’이라는 뜻이다. 73년 전 처음으로 돌아가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니 여초가 2002년 국회도서관 개관 50주년 기념으로 쓴 휘호 ‘계왕개래(繼往開來)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일2025-08-14
조회수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