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로 가는 길
형사재판의 갑호증과 을호증

정치권에서 갑을(甲乙) 논쟁이 치열하다. 사실 갑을의 원조는 법조계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배운 것이 갑호증, 을호증이다. 수십 년 전부터 갑호증, 을호증이라는 말을 써온 우리 법조계에 분명히 갑을의 저작권이 있다.
법조계의 갑을은 민사소송규칙 제107조 제2항에 명문 규정까지 있다. 원고가 제출하는 것은 “갑”, 피고가 제출하는 것은 “을”의 부호와 서증의 제출순서에 따른 번호를 붙이도록 되어 있다. 법조계의 갑을관계는 결코 상하관계가 아니라 공격과 방어의 수평관계라는 점에서 일반사회의 갑을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대법원규칙에까지 올려놓았을 것이다. 이는 행정·가사·특허·헌법재판에도 준용된다.
그런데 형사재판에는 아직 그런 규정이 없다. 공판중심주의와 당사자주의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의 관행으로 보인다. 형사공판기록의 증거목록에는 검사와 피고인으로 나누어 각각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목록 순번 20 검사 작성의 제3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공판과정에서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목록 순번 5 계약서’는 어떻게 호칭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현재 실무는 통일이 안 되어 있고 비경제적이다.
당사자주의원칙이 지배하는 형사재판도 공격과 방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다른 재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므로, 공판과정에서나 논고문·변론요지서 내지 판결문에서 갑호증과 을호증으로 부르면 편리할 것이다. 실무에서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서류를 흔히 ‘증 제5호’로 호칭하기도 하는데, 입증책임이 있는 검사가 제출한 압수물‘증 제5호’와 구별이 안 되어 부적절하다.
앞으로 검사가 제출하는 증거서류는 갑호증, 피고인과 변호인이 제출하는 증거는 을호증으로 불렀으면 한다. 피고인이 여럿이면 가, 나, 다 등의 가지번호를 붙이면 된다. 요즘 민사·행정·가사 판결문에서는 호증번호만 기재하고 증거의 표목을 일일이 기재하지 않는다. 형사유죄판결의 ‘증거의 요지’에도 현재처럼 나열식으로 증거의 표목을 굳이 기재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형사판결문에도 호증번호만 기재하면 소송관계인이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차제에 형사재판에서도 검사와 변호인이 서증과 의견서를 제출할 때는 꼭 부본을 하나 더 제출하였으면 한다. 물론 공판 전의 수사기록은 변호인이 어차피 미리 복사하므로 사본을 제출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 후 공판 중에 추가로 제출하는 의견서나 증거서류는 그 사본을 제출하였으면 한다. 기록 복사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법원이든 검찰이든 공무원에게 ‘클라이언트’이자 ‘갑’은 바로 사법수요자인 국민이다. 공직자에게 권력이 있다면 그것은 클라이언트이자 ‘갑’인 국민이 전폭 신뢰하고 임시로 맡긴 것일 뿐이다. 공직자 자신이 ‘갑’인 것처럼 권한을 행사하여서는 안 된다.
최근 서울중앙지법 김수일 부장판사가 법원 홈페이지에 올린 글은 그래서 반향이 크다. ‘법정에서 판사는 을이 되어야 하고, 재판당사자가 갑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법관이 가져야 할 올곧은 갑을정신이자 클라이언트 지향의 생존전략이다. (법률신문 201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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