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눈에 띄는 현상 하나. 그것은 바로 언론과 시민단체의 급부상(急浮上)이다. 여론을 등에 업고 ‘권부(權府)아닌 권력’으로 등장해 그 활약상이 눈부시다. 이제 우리의 권력구조는 분명 5권분립(五權分立)이다.
몽테스키외(Charles De Montesquieu : 1689-1755)가 3백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5권분립론을 주창(主唱)하였을 게 분명하다. 현실을 돌아보면 언론은 제4의 권부요, 시민운동단체는 제5의 권부라는 얘기가 실감 나게 들릴 것이다.
기실 여성상위(女性上位)에서의 우리네 부부들과도 같이 행정부상위(行政府上位) 시대에는 전통적인 3권도 이미 솥발처럼 온전히 서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입법부는 통법부(通法府)와 방탄국회(防彈國會)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춰지고, 사법부(司法府)는 ‘司法部’로 희화화되기도 한다.
올해 사법부(司法府) 예산은 국가 전체 예산의 4%던가? 아니다. 0.40%일 게다. 1997년에 0.46%,1998년에 0.41%였으니까. 하기는 원래 책상, 펜(요즘은 PC),종이만 있으면 사법부는 굴러갈 수 있다.
원래 3부요인은 3부 수반(首班)인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이다. 유신 때부터인가 대통령이 3부요인에서 슬그머니 빠져 민주군주(民主君主),제왕적 통령(帝王的 統領)으로 불리더니, 요즘에는 5부요인(국회의장, 대법원장, 헌재소장, 총리, 중앙선관위원장)이란 말이 언론에 등장했다. 이상도 하다. 5권분립 시대에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한 명씩의 수장(首長)을 뽑아 그들을 5부요인에 포함시켜야 옳았다.
5권분립 아래서 언론과 시민단체는 기존 3권이 정립(鼎立)한 가마솥의 물을 끓이는 장작불 화염이요 솥 안에서 끓는 물이다. 올해 벽두에는 법조(法曹)를 상대로 수사관, 검찰관, 재판관을 모두 아우른, 송대(宋代) 무소불위의 판관(判官)과도 같은 용맹스런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 이 참에서 모두들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여론이라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언론과 시민단체의 기세를 볼작시면 재판권도 환수해 갈 태세다. 양상군자(梁上君子)라면 몰라도 ‘도적놈’이라니. 법비(法匪)임을 자백하라고 주리를 틀면서 유죄추정(有罪推定)의 원칙이 지배하는 여론재판, 미국식으로는 「press trial」의 정글 속으로 몰아쳤다.
그저 머리나 조아리고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보니 그 심정이란 정말이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우리 법관들이 평소에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소송당사자들의 눈물을 건성으로 닦아주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지난 어려웠던 시절, 어찌 곡절이 없었으랴. 그래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국민을 위해 봉사하며 재판해왔다고 자부했다. 사법제도개혁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도무지 정상 참작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저 음부(陰府)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작년에는 바야흐로 소송 1백만 건 돌파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았다. 시린 눈을 부릅뜨고 밤을 낮 삼아 재판기록과 레슬링을 하였건만 여론은 우리에게 계속 「빠떼루」만 주고 있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1백만 건의 사건을 빨리, 잘 처리해도 단 몇 개의 사단(事端)을 통해 공든 탑은 무너지는 법이다.
언필칭 민주화, 그것도 참여민주(參與民主)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니 무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집권(集權)에서 분권(分權)으로 세상이 변했으니 시절 탓을 할 수도 없다. 이제 전통적인 국가권력은 쇠퇴 일로에 있다. 통제자에서 조정자로 역할이 축소됐다. 반면 언론과 시민사회, 그들의 자율성과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증대되었다.
정당은 제 기능을 못하고 소화불량에 걸려 정쟁(政爭)에 골몰한다. 그러니 시민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나 백화점 식으로 정치적·사회적인 모든 쟁점을 선점(先占)해 나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른바 529호실 사건에서도 시민단체가 심판을 맡았다. 무슨 이슈가 있으면 공복(公僕)들은 시민단체의 반응부터 살피는 게 다반사다.
언론도 국가권력으로부터 독자성을 더욱 확대시켜왔다. 반면 언론의 상업화가 공익성을 능가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추측․왜곡(歪曲)․분식(粉飾)․윤색(潤色)․과장․확대․유추 보도, 선정(煽情)보도, 속보․특종 경쟁에의 달콤한 유혹을 떨칠 수 없다.
원래 ‘저널리즘은 빠져 나올 수 있다는 보증만 있으면 무엇에든지 앞장서서 목을 들이민다’ 고 하지 않는가. 언론이 그 따위 유혹에 빠질 때 이는 결국 인권 침해로 연결된다.
우리 국민들은 판사 말은 우수마발(牛溲馬勃)로 알지만 언론에 대해서는 무척 신뢰한다. 국민들 눈에 언론보도는 진실이요 논평은 정의(正義)다. 대언론 맹목성(對言論 盲目性)은 언론이 그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인권을 쉽게 침해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토양임에 틀림없다.
원래 권력은 독(毒)이다. 독인 줄도 모르고 인간은 권력을 오․남용(誤·濫用)한다. ‘권부 아닌 권력’ 도 권력인 이상 그런 맥락에서 위험하다. 몽테스키외는 권력 가진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 불신에서 출발해 권력 상호간의 철저한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하자고 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에게 더 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으니 이제는 상승과 비상(飛翔)이 있을 뿐이다. 다행히 이제 심기일전할 천년대적 계기(千年代的 契機)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5권분립 시대니 여기에 적응하면 된다. 5권분립에서도 화두(話頭)는 여전히 견제와 균형이다. 사법부의 진면목을 보여주면 된다.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의 이념에 충실하도록 앞장서 노력하면 된다.
사법부는, 언론의 자유가 그 아무리 지고지순(至高至純)해도 홈즈(Oliver Wendell Holmes : 1841-1935)의 말마따나 극장 안에서 ‘불이야’라고 외칠 권리가 아니라는 것을, 여론이라는 호랑이 등에 업혀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면 결국 호랑이 밥이 되고 만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어야 한다.
칼도 지갑도 없는 사법부,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국민들, 시민들의 지원과 신뢰뿐이다. 입법부, 행정부, 언론, 그리고 시민단체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지 않는지, 법의 정신 안에서 적법절차에 맞게 행동하는지를 면밀히 음미하고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법부의 몫이다.
5권분립 시대에 맞게 우리 몫을 제대로 찾을 때, 그리고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정말 제대로 행사할 때야말로 우리 곁을 떠난 여론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우리 편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를 우습게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5권분립 아래서 사법부가 제 위상과 좌표를 가지고 너끈히 생존하는 방식이다.
사실 그 여론이라는 유령은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것이니 조급해 할 것도 없다. <1999년 3월 15일자 법원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