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탄원서와 진정서와 투서

탄원서와 진정서와 투서

변호사 황정근

 

어떤 형사 사건에서 수사 단서는 1장짜리 익명 투서였다. 검사의 증거목록상 순번 1이다. 내용은 공소사실과 거의 갔다. 변호인으로서는 부동의했고,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영향을 주는 그 투서가 법정에 현출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검사가 피고인신문을 할 때, “이러이러한 내용의 투서가 제출되었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라고 신문하는 것이 아닌가? 투서를 한 줄 한 줄 인용하면서 신문을 하기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그 투서의 내용이 궁금했던지 재판장은 그대로 진행하게 하였다. 재판부가 유죄 심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상황이 전개 되고야 말았다.

피고인의 상대방은 검사만이 아니다. 유죄가 선고되고 중한 형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진정한 상대방은 따로 있다. 피해자, 고소인, 고발인, 정치적 반대 세력 등이다. 공직선거법 또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에는, 벌금 100만원 이상이 선고되어 낙마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측은 잠재적 경쟁자일수도 있고, 그 경쟁자를 지지하는 세력일 수도 있고, 그 피고인의 정책에 결사 반대하는 주민일 수도 있다. 넓게 보면 민원인이지만, 엄격하게 보면 실질적인 소송당사자다.

증인이 아니고서는 재판절차에 참여할 길이 없자 이들은 생업을 제쳐두고 법정에 나와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끊임없이 재판부에 진정서·탄원서 또는 투서를 낸다. 익명, 가명, 허무인 명의의 서류,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구체적 사실이 적시되어 있지 아니한 서류, 단순한 풍문이나 인신공격적인 내용의 서류도 있으며, 가공의 소설을 써내는 허위 내용의 서류도 있다. 부당한 개인적 감정에 근거한 사실무근의 투서, 무기명 또는 막연한 어느 단체 일동 식의 투서도 있다. 검찰에서라면 대개 공람종결처리될 수준의 서류다(검찰사건사무규칙 1431).

그런데 재판 중인 사건에서는 이것들이 모두 기록에 편철되고 재판부가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피고인은 서서히 유죄 쪽 코너로 몰려가게 된다. 한 방의 펀치보다 무서운 것이 여러 번의 잽인 것이다. 부지런한 어떤 민원인은 대통령, 대법원장, 검찰총장, 관할 법원장에게도 제출한다. 그러면 전부 재판부로 이첩되어 기록에 똑같은 서류가 여러 개 편철되기도 한다.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한 것이라고 해서 이러한 서류들을 모두 기록에 그대로 편철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특히나 반대신문을 통해 탄핵되어야 할 내용의 서류라면 당연히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동의 여부를 물어 부동의하면 기록에서 배제해야 한다. 아니면 그 작성 명의인을 증인으로 신문한 후에야 증거로 채택하든지 하는 등의 엄격한 증거조사 절차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한 채 재판부가 그 서류를 통해 유죄 심증을 형성하고 피고인에게 보다 높은 형을 선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라도 통일된 실무처리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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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총관리자

등록일20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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