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팍팍한 현실에서 그것이 설사 환상일지라도 환상에 취할 수 있는 1%의 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는 통풍창고 말이다. 현실 전복일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의 ‘도취’가 다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준다. 사랑이 갖는 ‘숭고함’이 남루한 현실을 극복하게 한다. 자아가 잠깐이라도 고양(高揚)되는 순간이다. 그것이 마약 같은 희망일지라도. 스크린 속 ‘송중기’가 아니어도 괜찮다. ‘김수현’이 아니어도 괜찮다. 달짝지근한 ‘심쿵’하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억압된 감정을 풀 수 있다. 멜로는 잃어버린 청춘이며 잊어버린 열정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다.
로맨스가 판타지가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현실에 설움이 많다는 뜻이다. 독거노인과 독거청년, 취준생 100만명 시대, 열정페이(열정을 빌미로 한 저임금노동). 서러움과 함께 봄이 왔다. 어느새 바싹 마른 가지 끝에 연초록 잎이 솟아난다. 진다홍 꽃사과 꽃이 피어난다. 꽃이 피어 더욱 서러운 봄. 응어리진 감정을 풀어줄 로맨스가 필요하다. 판타지가 필요하다.
- 김용희(세계일보 2016년 4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