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검찰의 힘이 강해진 것은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고 있는 이 권력기관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판례법주의인 영미법계의 국가에서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이 담당한다. 한국 법체계가 속한 대륙법계라 해도 프랑스에서는 검사뿐 아니라 범죄 피해자가 직접 형사소추를 할 수 있으며, 일본에서도 1차 수사는 경찰이 맡고, 검찰은 사후적인 2차 수사만 담당한다.
그러나 한국 검찰은 기소권·영장청구권과 함께 수사지휘권을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수사를 할 수도 있는 수사권까지 갖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검찰의 막강한 권한이다. 이같이 기이한 권력 리바이어던(Leviathan)은 필연적으로 독선과 부패를 야기한다.
불행하게도 한국 검찰의 수사권·기소권 독점은 조선총독 데라우치마사다케(寺內正毅)가 한국의 독립운동 탄압을 쉽게 하기 위해 1912년 제령 11호로 공포한 이른바 ‘조선형사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의 잔재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은 셈이다.
이에 노무현은 두 가지 제도개혁을 추진했다. 하나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의 신설이었다.
그러나 검찰이 적극적으로 국회 로비를 하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된 것은 공수처 수사대상에 포함된 국회의원들이 법안 통과에 미온적이었거니와 그 자신 법안 통과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탓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대통령인 자신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면 검찰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리라고 믿었으나 돌아온 대가는 그의 참모들과 친인척, 후원자와 측근에 대한 집요한 공격과 퇴임 후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몬 인격적 모독과 보복이었다.
- 강준식,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김영사, 2017, 4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