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
불체포특권 유감

작년에 창원지검 모 검사는 “국회가 무슨 현대판 소도(蘇塗)냐.”고 일갈했다. 체포동의안 처리를 정치적 협상으로 뭉개고 사실상 불구속 기소를 요구하는 국회의장의 공문을 받아든 검찰총수는 정치권을 향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물론 정치권은 불구속수사 원칙을 들이대면서 반발했다. 언필칭 국민의 대표이자 사회지도층인 국회의원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애당초 구속될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정치인은 정치자금과 뇌물의 그 모호한 경계 때문에 교도소 담벼락 위에 서 있다고 하지 않는가.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은 의정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인정되는 헌법상 특전이다.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절대로 구속되지 않는다(헌법 제44조 제1항). 판사는 국회의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하기 전에 정부에 체포동의요구서를 제출해야 하며, 정부는 지체 없이 국회에 체포동의를 요구하도록 돼 있다(국회법 제26조). 국회의원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경우에 영장실질심사를 하기 위해 구인영장을 발부할 때도 판사는 반드시 체포동의요구를 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시스템상 국회가 체포동의안 의결을 차일피일 미루는 경우 판사는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는 데 있다. 최근 어느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요구안은 6개월 이상 끈 후에 결국 부결됐다. 극단적으로는 임기 만료로 동의요구안이 자동 폐기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이런 시스템은 분명 문제이다. 구속영장 청구를 받은 판사는 ‘신속히’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도록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01조 제3항과도 배치된다. 판사가 국회의원에 대한 영장사건을 몇 달씩 하염없이 붙잡고 캐비닛 안에서 잠자는 수사기록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불구속 기소를 하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불구속재판의 원칙 하에서 지당한 말씀이다. 인신구속을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말도 맞다. 구속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보자. 도대체 공판기일에 나타나질 않는다. 의사(議事) 일정 때문이라고 공판 연기 신청을 내면 그나마도 다행이지만, 무조건 출정 거부다. 형사재판도 국회의 의사일정만큼 중요한 국사(國事)다. 법을 만든 분들이 법을 안 지키면서 백성들을 어떻게 지도할 수 있는지, 기우(杞憂)일까. 보통의 피고인이 이유 없이 재판기일에 안 나오면 당장 지명수배 되고 법정구속 될지도 모른다. 출정을 기피하는 국회의원을 법정구속하려면 불체포특권이라는 철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천신만고 끝에 심리를 마치고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계류 중인 국회의원 재판이 언제 종결되는지 한번 지켜보라. 국회의원에 대한 영장사건이 몇 달씩 걸리는데, 공판사건은 몇 년씩 걸릴 게 틀림없다. 임기만료가 다 되어서 당선무효 판결을 하는 건 법원의 직무유기라고 비판들을 하지만,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불체포특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현재의 시스템은 국회가 정략(政略)과 무관하게 지체 없이 체포동의안을 의결할 것으로 믿고 이를 전제로 하여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박한 믿음이 현실에서 깨진 이상 현재의 시스템을 당장 보완해야 한다. 첫째, 체포동의안 처리시한을 두어야 한다. 국회법에 체포동의요구를 한 때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록 국회가 체포동의안 의결을 하지 않으면 구속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규정을 두면 된다. 그게 싫다면, 구속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규정이라도 두자. 그래야 영장 판사는 좌우지간에 무슨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둘째, 궐석재판의 위헌성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출정을 거부하면 법원이 불출석 재판을 강행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하든지, 법정구속시에는 체포동의가 필요 없도록 하는 규정을 두든지, 원활한 공판진행을 위한 세련된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 그래야 법원은 당선무효형이든 유효형이든 신속히 판결선고를 할 수 있고, 임기 다 끝나고 배지를 떼는 일은 없어질 것 아닌가. 재판하는 판사들이 아쉽다고 법을 만들 수도 없고 법률을 국회에서 개정해 주어야 하는데, 입법권을 거머쥔 그들이 제 목에 그런 방울을 달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1999년 4월 9일자 국민일보> 나는 1999년 12월 17일자 법률신문에 「선거법 개정의 방향 - 선거범 재판절차를 중심으로 -」라는 글을 기고하여, 피고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지정된 공판기일에 2회 이상 출석하지 아니할 때에는 피고인의 출석 없이 개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다시 주장하였다. 그 후 2004년 3월 12일 개정 공직선거법 제270조의2는 선거범에 관한 궐석재판제도를 도입하였다. 즉 선거범에 관한 재판에서 피고인이 공시송달에 의하지 아니한 적법한 소환을 받고서도 공판기일에 출석하지 아니한 때에는 다시 기일을 정하고, 피고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다시 정한 기일 또는 그 후에 열린 공판기일에 출석하지 아니한 때에는 피고인의 출석 없이 공판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270조의2 제1항 및 제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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