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이 판결문 쓰는 것 말고 무슨 책이냐고 결사 저항하던 나의 등을 한사코 떠밀면서 책 출간을 재촉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아내와의 약속 ― 저서 동시 출간 ― 을 지키기 위해, 1999년 3월 법영사에서 첫 저서 <인신구속과 인권>을 냈다.
1997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구속영장실질심사제는 여러 가지 논란과 혼돈,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위한 필수적인 제도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고 평가된다.
무릇 새로운 제도의 탄생과 그 성공적인 정착에는 여러 가지 난간과 파장이 있게 마련이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거대한 선박은 좌우로, 그리고 때로는 앞뒤로 흔들린다. 항해에서는 이를 롤링(rolling)과 피칭(pitching)이라 한다. 구속영장실질심사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속영장실질심사제의 시행과 함께 우리나라 형사소송절차 전반에 깊고도 넓은 파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파장은 바로 종래의 인신구속의 관행에서 벗어나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정신을 형사절차에서 제대로 구현해 보자는 의지를 중심으로 하여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가 더욱 강화되어 실무에 속히 정착하여야 할 터인데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다. 수십 년 동안 굳어온 관행의 탄력이 고질인 양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아직도 인신구속의 남발과 수용시설의 포화상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신구속제도의 운용 방향에 관하여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사고의 출발점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또 지향하는 목표점에 대한 각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인신구속제도에 대한 접근방식과 그 도달하는 목적지는 엄청난 괴리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항해에는 정확한 나침반과 해도가 필요하다. 눈 덮인 광야를 걸을 때 멀리 목표점을 보고 걸어도 나중에 지나고 보면 곧은길을 걸었다고 말 못할진대 하물며 바로 발끝을 내려다보고 걸은들 그 궤적이 곧을 수 있겠는가.
제도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를 좁히지 아니하는 한, 또 논의의 출발점과 몇 가지 전제적 조망에서 인식의 공유가 없는 한, 앞으로도 논의는 늘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상론과 현실론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책에서 먼저 수사절차에서의 인신구속을 바라보는 기본 입장을 몇 가지 밝힌 다음 헌법적․비교법적․국제법적 조명을 통하여 구속영장실질심사제의 이상과 현실을 반추해 보았다.
필자는 인신구속제도를 이론적․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다. 다만 1996년 9월부터 1998년 8월까지 대법원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으로 일하면서 그 업무상 우리나라 인신구속제도의 실상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이 책은 필자가 형사소송절차 관련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직무상의 필요에 따라 이곳저곳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수정․편집한 것이어서 필자 개인의 연구서로 내놓기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주저되는 바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구속영장실질심사제의 시행 준비과정에서부터 1997년 11월의 형사소송법의 개정까지를 비롯한 일련의 초창기 전개과정을 최단거리에서 뜬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증언한다는 일념으로 이 책을 펴내기로 결심하였다. 비판은 전적으로 필자가 감수할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형사사법 특히 인신구속제도의 이론과 실제, 그 이상과 현실,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우리나라의 인신구속제도, 나아가 형사사법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이 책에서 형사사법에서의 ‘국민의 기본적 인권보장’과 ‘헌법정신의 구현’이라는 기본입장을 견지하고자 하였음을 밝혀둔다.
고도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제 국민들은 ‘삶의 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인권보장 문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국민의 사법복지를 향상시킨다는 의미에서 삶의 질에 직결되는 ‘정신적 사회간접자본’이다.
더 나아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이제 국민을 위한 형사소송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형사소송의 국제규범에의 합치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세기, 국제정치의 기본 축은 역시 인권의 국제적 확산일 것이다. 문명과 야만이 교차한 20세기 말 동구 공산권의 몰락은 사실은 서방측이 시민적 및 정치적 인권의 바람을 솔솔 불어넣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의 당위성도 바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 즉 인권의 삼투작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 자신의 인권의 시계는 과연 몇 시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갈 길이 너무나 멀기만 하다.
형사소송법은 그 시대,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성숙도와 인권보장 수준을 여실히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우리는 실질적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국민의 향상된 인권의식과 변화된 요구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형사소송법이라는 그릇에 담아내야 한다. 형사소송법이 국민을 위한 권리장전으로 거듭나도록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 관점 하에서 현실의 제도를 운용하여야 할 것이다.
국민의 인권에 직결되는 사법권을 국민으로부터 수임 받은 법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투철한 인권의식과 굳건한 용기와 소신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국민의 사법으로 환골탈태하려는 개혁의지, 흔들림 없는 주관과 일관된 기준, 인간성에 대한 투철한 예지력과 판단력 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튼튼한 이론적 기반과 헌법 이념적 기초 및 세계적 시야를 가지고 굳건한 토대에 서 있으면, 나뭇가지가 바람에 흩날릴지라도 결국에는 거대한 수목은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열매는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법부로 21세기를 너끈히 생존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