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역사를 공부할 때 연도를 암기해야 했다. 그때 외운 것 중에 ‘조선 건국 1392년, 임진왜란 1592년’이 있다. 200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역성혁명과 임진왜란은 격동의 시기였기에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다루어졌다. 올해의 대하드라마 ‘정도전’, 2004년의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 이어, 영화 ‘명량’은 영화사를 새로 쓰고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불멸』에도 열광했다. 나라를 세운 사람이나 나라를 구한 사람을 조명함으로써 이 시대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울 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여망과 갈망을 대변한 것이 이들 작품의 성공 비결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 상(像)이 우리 역사 속에 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1392년 창업 후 수성(守成)과 경장(更張·개혁)을 게을리 한 조선은 정확히 200년 후에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위기를 맞았다. 창업 주역이자 조선 500년의 기본 틀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이 1342년에 태어났고, 임란 극복의 주역인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것은 200년 후인 1542년이다. 역사란 참으로 오묘하다. 임란 직전에 걸출한 인물 이순신의 인품과 그의 준비된 능력을 알아보고 천거한 이가 바로 서애다. 중대장 급을 장군으로 임명한 파격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순신도 없었고 조선도 없었다. 옛말에 명마(名馬)를 직접 구하기보다 명마 감별 능력을 가진 ‘백락’(伯樂)을 찾으라 했다. 서애는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명마를 발굴한 백락이었다. 역사는 200년 시차를 두고 나라를 세운 사람과 나라를 구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낸 것이다.
임금의 자질은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을 통괄하고[宰] 임금을 도와서 바로잡는[相] 재상이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소신을 펴던 삼봉은 1398년 왕권 강화를 노리는 이방원에게 일격을 당했다. 다시 200년 후인 1598년, 이순신은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말라고 독전하다가 전사한다. 이순신이 불멸의 별이 된 바로 그날 임금은 영의정 류성룡을 파직한다. 전쟁 승리의 영웅들이 사라진 조선에는 무책임하게 먼저 도망갔던 옹졸한 임금만 남았다. 낙향한 서애는 1604년까지 회고록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최근 ‘징비록’을 다시 읽어보았다. 징비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환난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 서문은 읽을수록 비장하다. “아아, 임진년의 재앙은 참담하였다. ··· 나 같은 못 난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떠받치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 근심과 두려움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나라를 세운 사람이나 나라를 구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애국심과 판단력과 겸손함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다. 특히 사람을 볼 줄 안다. 리더는 특히 위기의 시기에 빛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백성에게 희망을 주고 비전을 제시한다. 멸사봉공과 유비무환의 정신에 투철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따뜻하며, 그 말을 들어보면 합리적인, 인품의 지도자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현대판 징비록을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이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극한대립의 데드락(deadlock) 정치, 경제성장의 둔화, 소득분배의 악화, 저출산·고령화, 과도한 규제, 사회갈등의 확대, 불안·불만·불신의 심화, 사회안전망의 부족, 민간·국가 채무의 증가 등의 난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강의 기적이 멈춰버릴 수도 있다. 국가의 운영 방식과 사회 구조 및 사고 방식이 변하지 않으면 이제 죽는다는 절박감을 가져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달라야 한다. 모두의 눈빛부터가 달라져야 한다.
급기야 국가혁신까지 논의되고 있다. 이는 쉽게 말하면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다. 정치의 정(政) 자는 발걸음이 목표를 향해 똑바로 가도록 채찍질한다는 뜻이다. 그 목표란, 첫째는 내·외부로부터 백성을 지켜내는 것, 둘째는 백성을 배불리 먹여 살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은 국민을 지켜내고 국민을 잘 살게 하는 데 목숨마저 거는 자세로 일하는 지도자, 바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필요한 때다. 국민들이 제대로 된 ‘민생 큰 물결’을 일으키는 정치지도자를 고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