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퀸 이매뉴얼 어쿼트 앤드 설리반’(“QE”)이란 긴 이름을 가진 로펌이 있다. 최상급 소송 전문 로펌이다. 삼성전자와 애플 간 소송에서 삼성전자를 대리하여 유명해졌다. QE는 승소율이 약 90%다. 파트너 1인당 수익(PPP)도 글로벌 로펌 중 최상위권이다. QE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QE 변호사들은 법정에 나가기 전에 모의재판을 한다. 재판부와 상대방 역을 분담시켜 모의재판을 해보고 나서야 법정에 나간다. 그들은 치밀한 준비와 시뮬레이션을 통한 객관성 확보가 승소를 보장한다고 믿는다.
현재는 미래의 역사적 심판을 선취적(先取的)으로 해보는 일종의 모의재판이다. 학창시절에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 H. 카의 예리함을 좋아했다. 지금은 법률가여서 그런지 ‘역사는 현재를 위한 판례집’이라는 조용헌 교수의 통찰력을 좋아한다. 법조 실무에서는 교과서보다 판례집이 더 쓸모 있다. 자서전·회고록이나 평전은 유용한 판단사례집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경험을 배워 미래의 새 길을 개척해 나갈 지혜를 얻을 수 있는 판결집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는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학창시절, 6 〮25전쟁과 베트남전쟁, 그 이후 민주화 과정과 북방정책이 펼쳐진다. 그는 나의 부친과 동갑이다. 아버지 세대의 고통과 꿈을 함께 본다. 하권 『전환기의 대전략』을 보면 20여년 전의 선견력(先見力)이 놀랍다. 그는 취임사에서 “기회는 그저 기다리는 자에게보다 착실히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온다.”고 역설하며 미래를 준비했다. 당대의 인재를 발탁하여 펼친 국가전략은 배울만하다. 한·헝가리, 한·러, 한·중 수교와 같은 북방정책은 옳았다. 유엔 가입,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발효, KTX·인천국제공항·서해안고속도로·5대 신도시 기공, SBS 인가 등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린다. 그 성과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미화가 아니라 재발견이다.
에곤 바의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를 보면서는 동방정책·긴장완화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빌리 브란트 수상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엄청난 애국심과 강한 비전을 갖춘 정치가이자 변화의 최선두 주도자였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세상살이 어려워, 세상살이 어렵구나. 갈림길 많은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이백, 행로난(行路難)} 그때그때 돌출하는 현안과 쟁점의 해결에 몰두하느라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면서 지평선 너머의 미래를 준비·기획하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저어된다. 대한민국의 장기 전략과 비전을 구상하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할 때다. 미래를 내다보고 치밀하고 원대한 국가 비전과 전략을 기획하는 행정부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시스템화 해야 한다.
정부조직법 제27조 제1항에 따르면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 수립’은 기획재정부의 업무다. 흔히 기재부를 경제부처로만 인식한다. 1961년에 창설된 구 경제기획원을 기억하고 ‘경제기획’에 한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현행법상 기재부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중장기 국가발전전략 수립’ 업무이다. 그래서 명칭도 재정경제부가 아니라 ‘기획’재정부이고, 장관이 부총리다.
현재 기재부의 조직과 운영을 보면 이 점에 대한 인식도가 낮아 보인다. 조직이 경제·예산·세제·재정에 집중되어 있다. ‘기획재정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대통령령)’ 제16조의2 제3항 제1호가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 및 국가 미래비전의 기획을 위해 미래사회정책국을 두고 있고, 제2기 중장기전략위원회가 가동되고 있으나, 국(局) 단위 조직으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국가발전전략실’로 확대 개편하고 조직도의 맨 앞에 올려놓아야 입법 취지에 맞다. 전문 인력도 대폭 확충해야 한다.